예상치 못한 욕망이 솠아 오르는 때가 있습니다.

느닷없이 성난 화산처럼 분출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시간 저 지하어딘가에서 서서히 마그마가 끓어 오르다 어느날 지표면에 작은 틈새가 생긴,

바로 그 타이밍에 비소로 스물스물 솟아오르기 시작하는 용암같은 욕망 말입니다.

백두산과 한라산으로 치자면 한라산 같은 뭉근한 산봉우리를 결국 만들어내는 욕망이죠.

저의 대부분의 욕망은 '한라산'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분명 뜬금없는데 자연스러운 새로운 욕망이 기억도 나지않는 시절부터 생겼었습니다.

바로 '무언가를 엮어서 짜고 싶다'라는 마음이었죠.

무엇을 어떻게 엮을 것인가를 고민하다 '직조'라는 단어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퇴사하면 무얼할거냐라는 질문에 입버릇 처럼이야기 했습니다.

'직조'를 배울거라고!

 

그리고 3월31일 퇴사 이후 약 2주 뒤부터 망원동의 일명 '공방골목'에 위치한 '직조생활'에서 직조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직조' 와 '생활'이란 두 단어가 있는 동네의 길거리가 보이는 공방에서 '은실'쌤을 만나

2개월 동안 열심히 먹고 짜고 마시고... ^^ 우리의 일상의 일부분을 짜기 시작했습니다.  

 

직조는 서로다른 2방향의 실들이 교차하면서 직물을 만들어 냅니다.

한올 한올의 실을 선택 할수 있고 틀린부분이 있으면 아쉽지만 다시 풀어 수정을 할 수 도 있습니다.

한땀한땀이 시간이고 정성이어서 하나의 직물은 오롯히 그 시간을 담아내서 직물은 단순히 미학적인 결과물 뿐만이아닌

시간에 대한 정직한 결과물을 이기도 합니다. 

그 단순한 의미와 행위가, 뭐하나 마음대로 만들수 없고 시작과 끝을 알 수없는 복잡한 이 시대에 명쾌한 위로가 되어주는 것 같습니다.

 

겨울의 한가운데인 요즘도 퇴근을 하고나서 베틀앞에 앉아 가만히 작업을 할 때가 있습니다.

(2달간의 수업의이 끝나고 저는 과감하게 베틀을 구입하였습니다.)

서두르면 실수가 생기기 때문에 '느리게' 실을 한올한올 궤어야 합니다.

느린것이 놀림거리가 되고 단순한 것이 비웃음거리가 되는 요즘-

단순해야만 하고 느려야만 하는 이 행위를 통해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저뿐만은 아닐 것 같습니다.

 

봄이 오면 어느 길거리 마켓에서 직조한 작업물을 들고 물물교환을 시도하거나 판매를 하는 저를 발견 하실 수도 있습니다 :)    

 

 

+망원동 직조생활에서의 작업모습

+집 창가에 걸려진 이것저것들

 

+직물을 이용해서 가방도 만들었습니다.

 

+안입는 옷들을 잘라 실을 만든 후 러그도 짜보았습니다:)

 

 

 

                                                     

일을 하지 않은지 3주란 시간이 흘렀습니다.

3주동안 '요즘 어떻게 지내냐'란 질문에 '너무 바빠'란 대답을 했었습니다.

도대체 백수가 왜 바쁜것인지...그것도 '너.무' 바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렇다고 딱히 기억에 남은 사건도 기억도 없으면서 말입니다.

 

오늘은 3주만에 정말 특별한 약속도 계획도 없는 첫날입니다.

(어젯밤엔 내일 출근해야하는 직장인의 슬픈 얼굴을 보며 나도 모르게 크게 함박미소를 지어보이기도 했습니다)

 

4월이 되어 읽기 시작한 책 만 6권이 됩니다.

그 중 반절이상 읽은 책은 물론 단 한권도 없습니다.

비어있는 시간 속에서 비어있는 책읽을 시간을 만드는 일이 이상하게도 죄스러워서

매일같이 외출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뭔가를 하는 하루하루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던 지난주 신영복 선생님의 '처음처럼'이란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신영복의 언약'이라는 소제목을 가진 '처음처럼'은 일반책의 두배두게의 책이지만

페이지에 짧은 글과 신영복선생님의 서예나 그림으로 채워져서 꽤나 여백이 많은 책입니다.

무엇보다 사색을 통해 쓰여진 진한 사유의 글들이 책의 두게보다 더 두터운 이야기를 하는 책이기도 합니다.

 

지난주 책의 1/5가량을 읽었고

'오늘은 이책을 다 읽어 버리리라' 결심을 하여 집 근처 카페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1시간반가량이 흘렀고 남은 책의 분량이 1/5가량이 남은 것을 보고

'음..오늘 다 읽을 수 있겠구나' 개운해 하고 있었습니다.

 

앞서 이 책을 읽었던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책을 다 읽어 간다며 뿌듯하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남자친구는

'그 책은 사색이나 묵상같은 책인데 왜 그렇게 빨리 읽어요?' 라며 질문을 하였습니다.

 

 

 

남자친구와 자주 책을 함께 읽습니다.

그때마다 남자친구는 저의 속독에 놀라했습니다.

소설이든 철학이든 책의 난이도와 종류에 관련없이 대개 저는 속독을 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 버릇의 시작은 바야흐로 12년 전 고등학교 3학년시절로 되돌아가야합니다.

그 당시 모의고사를 칠때면 언어영역에서 늘 시간이 모자라 마지막엔 풀지못한 문제의 답을 몰아찍기 일수 였습니다.

그때부터 글을 속독하는 훈련을 하였습니다.

단어하나하나의 의미를 파악하기보다는 문장전체를 통으로 읽어버리는 연습을 했던 것입니다.

시험문제를 풀기위한 글읽기를 열심히 단련했던 것이 었습니다.

 

저의 글을 읽는 방법은 독서에서 뿐만이 아니라 저의 삶에도 묻어나 있습니다.

'정황을 재빨리 파악하고 어느정도의 오차없이 빠르게 문제를 해결하기'의 삶의 방법이 어느새 스스로가 되어있었습니다.

 

반면 남자친구는 문장 하나하나를 천천히 읽는 독서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엔 속독하는 스스로에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독서를 통해 천천히 다양한 사고를 해나가는 남자친구를 보며

나의 독서 방법은 '빈깡통 같은 독서' 였구나를 깨닫게 됩니다.

 

확대해석일지도 모르겠지만

이러다 나의 삶이 '빠르게 굴러간 빈깐통'이 되어버릴 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합니다.

쉽게 흘러간 지난 4월의 여러날들처럼 어제일도 기억나지 않을만큼의 가벼운 시간들로

제 삶이 채워져 버린다면 -

 

그래서 오늘은 '처음처럼'을 더 이상 읽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남은 1/5의 글들은 천천히 그 글의 깊이를 해아리며 읽어보려 합니다.

새로운 독서 방법이 새로운 삶의 방법을 위한 작은 시작이길 바라며 :)

 

 

 

 

 

 

 

 

 

 

 

 

 

 

 

 

 

 

퇴직

실업

백수

구직

이직

.

.

.

단어들이 거칠거칠하고 퍽퍽하기 그지없습니다.

 

취업

.

.

.

이란 단어도 그다지 세련되지도 따뜻하지도 않네요.

 

그 단어들 속에 제 퇴직의 이유 중에는 '임.금.체.불' 이라는 텁텁하고 쓰디쓴 단어와

청산되지 않은 '임금' 이라는 공허한 단어들도 둥둥 떠다닙니다. 

아직도 관할고용센터 직원이 저를 보며 말한  '안쓰럽다'는 단어가 제 귓 속을 맴돌고 있습니다.

'안쓰럽다'는 말에

'제가 미련했습니다' 라고 멋적게 대답하였습니다.

열심히 해왔다고 생각한 지난 시간은 안쓰러움과 미련스러움으로, 또 그렇게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2016년이고 누워서 손바닥만한 화면으로 티비도 보고

미국에 있는 친구와 화상통화도 하는 시대에 -

건축이라는 인간의 역사와 함께 해온 학문을 공부하고 업으로 삼아온 저란 사람은

그 역사의 고리 덕분인지, 시대착오적인 노동과 정당한 분배에 대한 문제로 인해

 

3년 6개월 만에 드디어! 백수가 되었습니다.

백수 말고 다른 단어를 찾을 수 있을런지는 모르겠지만(실업자 . 구직자. 뭐 그런거 말고 ..)

자연인-이라고 할까요?

 

 

그래, 도시 속 자연인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낮시간에 병원도 갈 수 있고

시간에 쫒기지 않고 마음껏 걸어다닐 수 있습니다.

아침에는 강아지와 긴 산책도 할 수 있고

그동안 미뤄뒀던 취미생활도 하려합니다.

 

무엇보다 이제는

할 수 있는 것보다

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행동해 보려 합니다.

 

3년 그리고 6개월

그동안 좋은 동료들과 함께 재밋게 또 열심히 다녔던 일터를 떠나는 날

한가득 품에 짐을 안고서 너무 환하게 웃어버렸습니다.

'하나의 매듭이 묶여지는 순간이구나..' 라는 생각에 정말 환하게 웃으며 건물을 나왔습니다. 

 

 

 

 

 

2012. 11. 1~ 2016. 3. 28

bye b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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