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靑春)이라는 말은 과연 인생의 어느 시기부터 어느시기 일까요?

올해 31세가 되는 저는 과연 청춘인 걸까요. 아닌 걸까요?

푸를 청. 봄 춘- 아마도 사절기의 그 시작점의 푸르름과 같은 시절이라는 것이겠지요

인생을 100세로 두고 보았을때^^, 이미 저의 시간은 뜨거운 여름날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청춘의 한가운데 만난 친구들이 있습니다.

일명 경대핑클로 부리우던 ㅎㅎ 동전노래방 매니아였던 저를 포함한 4명의 망아지같은 여인들입니다.

서울에 있는 대학교를 다니기 전, 고향인 대구에 있는 '경대'에서 1학년을 보냈었습니다.

한학기 수업 참여와 일년의 휴학 그리고 남은 한학기를 수료해서 1학년을 2년에 걸쳐 다녔던 것입니다.

 

수능날 아침에 먹은 미역국때문이었는지 그날 점심으로 싸간 죽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그녀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는지...

서울드림을 꿈꿨던 20대의 시작은 그렇게 고향의 대학교에 '부적응'을 동반한 채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들은 다들 비슷한 상황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불덩어리들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청춘의 시간.

 

그때 '공강'이라는 고등학생 따위는 누리지 못하는 꿀같은 시간이 왔을때

우린 동전노래방의 작은 상자속에서 소몰이 창법으로 노래를 불러댔습니다.

'축제'떄는 잔디를 뽑아 전도 부쳐보았고, 널디너른 캠퍼스를 술 취한채 고성을 지르며 뛰어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복학생'이라 불리는 시커먼 남정네들을 피해 다니며 키득거리기도 했었지요.

 

그렇게 마음 속의 불덩어리를 식혀가며 각자가 어떤 삶을 원하는 가를 고민했고

4명 중 2명은 서울에 있는 대학으 재입학을 했고 2명은 대구에서 대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10년이 지나

우리 4명은 10년 전 생각도 하지 못한 모습으로, 서울이라는 도시에 살고 있습니다.

사는 방법도 다르고 하는 일도 제각각이지만 그 청춘이란 시간속에 아로새겨진 습관과 같은 것들은

지금의 우리를 같은 모습으로 묶어주기도 합니다.

 

'경대핑클' 중 '마텽'을 맞고 있는 '주소'가 어느날 딸기청을 담궈 온것을 시작으로

우리는 추운 겨울이면 타향인 서울하늘 아래에 모여 함께 '청'을 담그곤 합니다.

그 중 우리가 함께 처음 담근 '청'은 바로

'사청' 입니다.

 

<만드는 방법>

베이킹소다로 사과를 깨끗이 씻어서 작은 조각으로 잘란낸 후

밀폐용기에 사과와 설탕을 1:1로 번갈아 가며 채워줍니다.

그리고 중간중간 깨끗하게 씻은 작은 계피스틱을 넣어 줍니다.

그리고 밀봉을 한 다음

상온에서 3일을 숙성시키고 냉장고에서 4일을 숙성시키면 

우리의 청춘을 닮은 푸르른고 알싸한 맛의'사과계피청'이 완성됩니다.

 

<마시는 방법>

뜨거운물 한컵에 '사과계피청' 큰숟가락으로 한 스푼

탄산수와 함께 마셔도 맛있고

우유나 요거트와 함께 먹어도 맛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뜨거운 물에 사과계피차를 마실때면 왠지모를 마음의 위로가 되곤 합니다.

사과는 비타민 C와 유시간이 풍부해 피로해소에 좋으며 계피는 몸을 따뜻하게 해줘

겨울철 체온을 유지하는데 좋다고 합니다.

사과의 달콤함과 싸한 계피향의 어울어 짐이 차에 담겨 부드럽게 마실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는 토요일 집을 방문하는 손님들과 사과계피차를 나눠 마실 생각입니다.^^ 

 

 

 

 

 

 

 

 

 

 

유난히 강렬한 한파가 있었던 올해의 겨울도 끝이 났습니다.

몇일 전 올겨울 마지막 '사과계피청'을 담궜습니다. 

그리고 어젯밤, 4명 중 유일한 기혼자인 '쁘띠'가  새생명을 순산했다는 기쁜 소식도 전해 들었습니다.^0^

 

뜨거운 청춘의 시간이 익어 꽃를 피우는 여름의 시간이 오는 것 처럼

모든것에는 그것이 익어가는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청춘일 때에는 알지 못했던 그 시간의 의미...

 

청(淸) 이 익어가는 침묵의 시간이 헛된 것이 아님을 비로소 알아가는 것 같습니다.

     

 

 

   

  

 

  

이 글은 '일상을 요리하다'라는 카테고리의 첫 글이다.

'일상'과 '요리'란 이야기를 어떻게 이 블로그에 담을까에 대한 고민이다.

 

 

폭주하는 이미지의 시대다.

10년 전 도토리를 모으며 배경음악을 구매하고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올리고 일기를 쓰던 싸이월드의 시대는 완전히 끝이났다.

각종 소식들로 가득한 화면에 일종의 영역표시인 '좋아요'를 무의식적으로 눌러대던 페이스북의 글들도 이제는 귀찮아졌다.

2016년 이미 많은 사람들이 가입을 했고.. 끝까지 '하지 않겠다' 결심한 나 조차도 ' 인스타그램'에 가입했다.

인스타그램에서 긴글은 '쿨 하 지' 못하다. 이미지와 헤시테그면 충분하다.

(아직 인스타그램의 정확안 어원이 무엇인지 헤시테그는 어떻게 나온 단어인지 알지 못한다) 

이미지를 위한 이미지에 대한 이미지인 매체를 통해 우리는 '소통'한다고 생각한다.

하루에도 몇장식 올라오는 사진들, 끊이없이 내려지는 스크롤... 과연 그 끝은 있을까 싶다.

그 끝없음 만큼 우리들은 그 누군가와 진정 소통하는 것일까?

있다면, 그 소통은 과연 어떤 것일까?

 

인스타그램에서 슬프거나  비참하거나 더러운 이미지를 본적이 거의 없다.

멋지게 찍은 다큐사진 등에서 그 비슷한 사진을 본적이 있지만 그것은 강렬한 색감을 가진 슬프장면을 찍은 멋진 이미지였다.

인스타그램 속 세상은 비현실적 행복의 세상이며 증명되지 않은 삶의 현장이기도 하다.

우리의 삶은 고되고 슬프기도 하며 뼈가 시리게 추운 다층적 감정이 가득한 세상인데 인스타그램의 세상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그래서인지 나는 그 속의 소통이 그리 맘 편하지만은 않다.

 

진정 행복한 이미지가 아닌 '이미지적 행복'에 둘러쌓여있다.

 

이미지적 행복의 정점에 '킨포크'가 있다.

 

소셜테이너 이효리의 블로그도 있다.

 

 

 

킨포크적 삶의 방식과 이효리님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픈 것은 아니다.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의 유사성은 우리들의 인스타그램의 이미지에서도 나타난다.

심지어 '킨포크 스타일로 사진찍는 법'이라는 글도 있었다. 우리는 도시에서도 킨포크적 이미지로 포틀랜드의 여유로운 삶을 흉내를 낸다.

소셜테이너 이효리님도 제주도에서 '킨포크'적 외래 행복을 이미지로 담는다.

각종 필터가 장착된 스마트폰의 카메라는 그 흉내를 보다 쉽게 누구나 할 수 있게만든다. 

우리는 디스토피아적 세상에서 유토피아를 흉내며 매일같이 남몰래 좌절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소통해야 하는 것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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